갑작스레 웬 희망편지입니까?
지금 상황은 절망에 더 가깝지 않나요?
이주민-다문화가정에게 희망이 과연 어울릴까요?
<김해성 희망편지>를 받아보신
몇몇 분이 질문 아닌 반문을 던졌습니다.
제 형편을 아시면서 반문을 던지니 매우 아팠습니다.
배부른 한 여인이 찾아 왔습니다.
동거하는 남자가 사람을 죽였다는 것입니다.
자신도, 남편도 불법체류 외국인이었습니다.
어렵게 설득해서 자수를 시켰습니다.
그 남자는 당연히 구속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서 시시콜콜 물어 봅니다.
결론은 이것도 저것도 도와 달라는 내용입니다.
자수를 시킨 죄로 여러 가지로 시달렸습니다.
하루는 불쑥 찾아와서 저에게 협박을 했습니다.
7개월이나 된 태아를 유산시키겠다는 것입니다.
책임져 주겠다고 설득해서 간신히 출산을 했습니다.
아이는 세상에 나오자마자 '불법체류자'였습니다.
'무국적'에 의료보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기는 제대로 울지도 못했습니다.
알고 보니 선천성 심장판막증 환자였습니다.
도저히 희망이라곤 없는 절망의 끝자락에 서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내아이 이름을 '희망'이라고 지어 주었습니다.
원래 희망이 있어서 '희망'이라 지은 것은 아닙니다.
'절망' 투성이기에 그냥 '희망'이라고 붙인 것입니다.
아이는 무료로 심장수술을 받았습니다.
다행하게도 건강이 금세 회복되었고요.
아이 아버지는 정상이 참작되어 2년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재롱을 부리던 희망이는 출국을 했습니다.
그 아버지도 만기 출소되어 강제 추방됐습니다.
그런데 10년여 만에 희망이에게서 사진과 편지가 왔습니다.
불쑥 커서 코 밑이 거무튀튀한 모습입니다.
그리고 며칠 전에는 그 아버지가 인사를 하러 한국에 왔습니다.
"우리 가족에게 희망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절망?' 그리고, '희망?'
그런 이야기 할 틈이 없었습니다.
울며불며 절규하는 그들처럼 맘껏 울 수도 없었습니다.
제게 도움 청하는 이주민들의 삶을 살펴보면 막막합니다.
그들의 깊은 병과 사연을 듣다보면 암담(暗澹)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다문화의 미래는 마냥 희망적이진 않습니다.
다문화에 대한 호감과 친절은 언제든 급변할 수도 있습니다.
갈 길은 멀고 할 일은 많은데 주저앉아 있을 순 없었습니다.
절망을 그대로 두면 그것은 버려진 주검처럼 악취를 풍긴다는 것
절망을 그대로 두면 그것은 성한 희망마저 썩게 만들 것이라는 것
절망의 그들과 함께 절망의 언덕을 넘어가야 하기에 더욱 절실한 희망!
그러므로 김해성 희망편지는 희망을 가장한 아픔의 호소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김해성 희망편지는 절망을 이기기 위한 몸부림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김해성 희망편지는 진짜 희망 세상을 간구(懇求)하는 가시밭 행진입니다.
희망의 변이 길었습니다.
시 한 편을 동봉합니다.
절망은 희망의 어머니
고통은 행복의 스승
시련 없이 성취는 오지 않고
단련 없이 명검은 날이 서지 않는다
(문병란 시인의 시 '희망가' 중 일부)
- 다문화 희망세상을 꿈꾸는 김해성 목사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