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걸로 하지 뭐
by 흰머리소년 | 10.06.27 22:45
 


같은 것으로 하지 뭐....


'묻어가기'라고도 하지만 한국인의 '같은것으로 하지 뭐'는 늘 입에 붙어 달고 사는 주관없는 선택의 행태중 하나다.


그날은 시험을 위해 공개 강좌를 들으러 갔던 어느 토요일이었다.
전직원이 응시를 해야 하는 시험이라 남녀상하를 불문하고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 강의장에 아침 일찍 부터 장사진을 쳐야만 했다.
수면제 같은 강의를, 한시간 듣고 10분 쉬는 식으로 오전을 보낸 우리 동료들과 가까운 남대문시장 골목의 한식당으로 점심을 먹으러 갔다.


p는 언제나 처럼 내가 주문을 하면 '같은 것으로 하지 뭐'였고, 그것은 김치찌게 였다.
뭐 어떠랴. 누구나 먹는 것이 김치찌게고 그 맛이 한국 어디를 가든 거기서 거기니 묻어 간다고 해도 달리 이상할 것도 없는 메뉴였다.
더운 날도 아니었지만 얼큰한 김치찌게에 밥을 말아서 뚝딱 해치우고 나니 귀밑에서 땀이 주르륵 흘러 내렸다.


여담이지만 남대문 시장은 일본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이다. 잡다한 물건들이 한곳에 많이 모여 있기도 하거니와 그 가격도
옆에 있는 굵직한 백화점에 비하여 거의 공짜 수준이니 한국의 냄새도 나면서 가벼운 주머니로 만족할 쑈핑을 할 수 있으니
자연스레 그 인기가 많아진 것도 당연한 것이리라.
그래서 그런지 가게마다 형광펜으로 쓰여진 일본어 가다까나 광고판이 한두개가 아니다.
가게 주인들도 호객을 하려면 간단한 일본어 몇마디는 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외국 여행을 다녀보면 일본인이나 중국인인줄 알고 '스미마셍'이나 '니하오마'를 외치는 경우는 있어도
'안녕하세요'하면서 잡아 끄는 호객꾼이 없어 사고싶은 것이 있는 가게도 그냥 지나쳐 오는 경우가 많은데
즐비한 자국어 광고판에 샤방샤방한 자국어로 들이대는 가게를 지나칠 관광객이 좋아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점심을 먹은 우리는 배를 두드리며 커피 한잔 할 곳을 찾고 있었다.
식후 커피는 자기가 쏜다며 우리를 이끄는 막내를 따라 우리는 스타x스 비슷한 커피전문점으로 우르르 들어갔다.
바리스타 뒷쪽에 메뉴판을 보니 그다지 눈에 들어오는 메뉴도 없을뿐 더러
커피를 마시지 않는 나로서는 익숙한 커피 종류도 없었다. 그저 아메리카노 정도......
그런데 저 귀퉁이 그곳에 작은 글씨로 쓰여진 '에스프레소'라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유럽 여행을 했을때 로마의 변두리 모텔에서 하룻밤을 묵었는데, 아침 일찍 일어나 창문을 여니 출근을 하는
그곳 사람들이 아침 부터 하나 둘 모여드는 곳은 동네의 편의점 같은 곳이었고, 그곳에서 신문을 하나 사서는 읽으며,
손가락 하나 들어가는 손잡이를 가진 에스프레소잔을 홀짝 거리는 모습을 보았던 것이 인상 깊었기 때문이다.

 
잘생긴 이태리 남정네의 짓이라 그랬던 것이었는데 그냥 따라서 해보고 싶은 치기 어린 충동도 있었다.
당시엔 모텔을 내려가서 그 것 한잔 먹을 시간이 없어, 그냥 보고만 왔으며, '나중에 한 번 마셔 보리라'하며 내점 다짐만
하고 있던 차였는데, 안그래도 그것이 맛이 진하여 한국인 입맛에는 맛지 않다는 상식만 알고 있었고,
늘어지는 오후를 따분한 강의로 보낼 걱정에 마침 안성마춤의 메뉴라고 느껴져 당당히 주문을 했다.


'에스프레소 일 잔'

 
계산 하는 친구가 힐끗 내 얼굴을 한 번 쳐다 보았지만 나는 나의 멋진 발음 탓이려니, 아니면 적어도
에스프레소를 소화할 수 있는 몇 안되는 한국인을 보는듯한 신기함이겠거니 하면서 의기양양하게
미소를 날려 주었었다.
그러고 있는데, 뒤에 있던 p가 몹쓸 묻어가기를 또 하는 것이 아닌가.


'어...나도 같은 것으로.....'
속으로 내심 멋지게 주문 했는데, p 때문에 포스가 망가지는 것이 별로 였지만 늘 묻어가는 것이 일상 다반사인
것이니 그냥 넘어갈 수 밖에 없었다.
저만치 앉아서 주문한 커피들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수다를 떠는데, 잠시후 쟁반 하나 가득 각자 주문한
것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것이 무엇인가......
커피 전문점의 모든 커피가 뚜껑이 닫힌 종이 머그컵으로 나오는 것이었고, 내것을 들어보니......
커다란 커피컵에 10분의 1도 안되는 깊이로, 진하디 진한 에스프레소가 담겨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을 마시려 컵을 기울이니 컵 끝에 내려 오기도 전에 컵에 다 뭍어 입에 닿는 것은 몇 방울 안될 정도가 아닌가.......
내심 흰색 에스프레소잔을 손가락 하나로 들어 마시는 이탈리안식을 생각 했던 나의 상상은 '파삭' 깨지고
"뭐야? 뭐 그런걸 시켰어?"를 시작해서 온갓 우스게 소리로 나를 비아냥거리는 웅성거림이 들려 왔다.

 
폼나게 멋지게와 상반된 결과에 황당했지만, 나 보다도 나를 따라 에스프레소를 시켰던 p의 황당한 얼굴에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줄 알고 컵 뚜껑을 열어 살피는 모양이며 몇 방울 안되는 진한 커피액이 입에 들어가자
얼굴을 구겨가며, 그나마 아까워서 빨대를 가져다가 커피컵 벽을 긁어대는 모양이라니.....
p는 아예 에스프레소가 뭔지를 몰랐던 것이다.


속으로는..... '따라 하다가 쌤통이다'싶었지만 주문 받던 친구의 야릇한 눈빛이 이 황담함을 예견한 것이라 생각하니 약이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이 상황은 한시간 뒤의 황담함에 비교하면 전초전에 불과 했다.
그렇게 커피숍을 나온 우리는 다시 강의장으로 향했고, 졸린 눈을 부비며 오후 강의에 전념할 수 밖에 없었다.


강의가 중반으로 들어서는 가운데.....
나의 안색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안그래도 위장이 좋지 않아 커피를 잘 마시지도 않는데, 원액에 가까운 에스프레소가 위장으로 들어 갔으니.....


뱃속은 갑자기 구라파 전쟁이 일어난듯 꿈틀대기 시작 했고, 좌충우돌 위장이 뒤엉키더니 괄약근 쪽으로
가공할 가스가 모이는 것이 감지 되었다.
점심때 먹은 얼큰한 김치 찌게에 에스프레소를 첨가 했다는 느낌이 뇌리를 스치며, 콜라에 드라이 아이스를
넣은 모양으로 복부는 점점 부풀어 오르고, 자꾸만 자꾸만 가스를 분출 하겠다는 아우성이 커지는
종잡을 수 없는 위기의 상황으로 내 몸은 치닫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목격하고 말았다.
나와 똑같이 배를 감싸고 식은 땀을 흘리는 무언의 절규를......
p 였다.

 
그가 나와 눈이 마주쳤을때,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왜 하필이면 그것을 시켜서 나를 사경에 해메이게 하는가'
p는 원망어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다 보았지만 나라고 어쩔 수 있겠는가.
'나보고 어쩌라고....'

 
우리 둘은 벌게진 얼굴을 하고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지체 없이 벌떡 일어섰다.
주변 동료들은 우리의 이런 통일된 행동이 의아했을 것이다.
우리는 복부의 힘을 최대한 유지 하면서, 괄약근에 힘을 주고 목표를 향해 한발 한발 다가갔다.


우리는 나란히 복도를 달렸다. 아니 거의 초죽음이 되어 기어다가시피 어떻게 갔는지도 모르게
강의장 밖 화장실에 도착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화장실 문을 열고 각자의 자리에 착석 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가공할 압력으로 나아갈 구멍을 찾던 뱃속의 가스들에게 탈출구를 열어 주었다.
요상 야릇한 화약 냄새와 함께 들려오는 집중 포화 소리......
나는 p와 그곳에 앉아서 마치 전쟁에 나아가 승리하고 돌아올 때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전우애를 느꼈다.


 


그날 이후로.....
p는 절대 나와 함께 가는 어디에서든 '같은 것으로'라는 주문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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