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인간애의 낭비’ 프레드 리버만(Fred Liberman) ⑤끝<
by 한종우 | 14.07.03 10:20




 

1929년 1월4일 뉴욕시의 브롱스에서 태어났다. 누나, 형 그리고 여동생의 4남매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형은 2차대전에 참전해 두 번 부상을 당했다, 그래서 형을 항상 전쟁영웅(戰爭英雄)으로 생각하고 자랑스러워 했다.

 

형은 전쟁 경험을 털어놓지 않았지만 나는 동료 참전용사들과 함께 항상 한국전쟁에서의 경험을 얘기하곤 했다. 1946년 6월 뉴욕시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뉴욕시립대(City College of NY)에서 회계학을 전공했다. 한국에 대해선 일본 식민지였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1950년 10월 징병으로 육군 보병 훈련을 받았다. 포트 루이스(Fort Lewis)에서 특별 보병군사훈련을 받았다. 이미 한국전쟁이 발발했던 터라 한국에 파병될 줄 알았지만, 육군이 되어 다른 나라도 가본다는 것을 아주 흥미롭게 생각했다, 젊어서 그랬던 것 같다.

 

1951년 2월 워싱턴 주의 시애틀에서 한국으로 향했다. 배 안에서 맨 위의 침대를 썼는데 그곳이 빨래를 널거나 총기를 고정시키는데 편리해서 자청한 것이다. 이때 배멀미를 극복(克服)하는 비법을 익혔는데, 항상 자기 몸을 수평으로 유지하면 배멀미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일본 도쿄의 캠프 드레이크(Camp Drake)에 들려 모든 보급품을 지급받은 후 1951년 3월 인천에 도착했다. 대기하던 기차를 타고 전방에 보내져 24사단 19보병 연대 1대대 A 중대에 배속됐다.

 

1951년 10월은 유엔군이 대공세를 취하던 시기로 매우 위험했다. 부상도 당하고 죽을 뻔한 고비를 여러 번 넘겼다. 한번은 적의 박격포(迫擊砲) 공격으로 모두 참호(塹壕)로 뛰어들었는데, 그 참호의 위에 있던 나무에 박격포탄이 맞아 그 파편이 동료의 목을 끊어서 그자리에서 죽어가는 끔찍한 광경을 목격하기도 했다. 지금도 그 순간을 잊을 수 없다.

 

그때는 몰랐는데, 70대가 되어서 그 동료의 부모와 형제자매들을 찾았어야 한다는 안타까움이 강하게 남게 되었다. 또 한 번은 중공군의 대공세 속에서 고지(高地)를 탈환(奪還)하는 작전을 수행하던 중, 적의 사격에 쫒겨 참호에 곤두박질쳤다가 동료들이 엄호사격(掩護射擊)하여 빠져나왔는데, 정말 죽는 줄 알았고, 그 순간, “어머니”를 외쳤던 생생한 기억이 있다.

 

식사는 주로 C-Ration을 먹었는데, C-Ration에 있는 메뉴가 달라서 서로 좋아하는 음식을 교환하곤 했다. 나는 소시지와 콩 요리의 배식을 제일 좋아했다. 당시 계급은 중사(Sergeant First Class)로 월급은 약 170불 정도를 받은 것으로 기억한다.

 

한국인 2명이 함께 근무했는데, 처음에는 민간인으로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Korea Service Corps 소속이었다.

 

한국으로 파병되기 직전에 고등학교 때 만난 클레어와 약혼한 상태였다. 당시엔 젊어서 그랬는지 약혼자를 두고 한국으로 가는 것이 그리 괴롭지는 않았다. 어머니와 형제들 그리고 약혼자에게 편지를 자주 썼다.

 

편지 내용 중에는 한국의 한 마을을 완전히 소개(疏開)시키는 작전에서 느꼈던 것이 있다. 미군이 각 집을 조사하였는데, 젊은 남자는 하나도 없었고, 노인, 아이들 그리고 젊은 여성뿐이었다. 미군들이 이들을 트럭에 태워 이동시켰는데, 그 과정에서 젊은 여자들을 성추행하는 일이 있었다. 여자들이 달아나는 모습을 보며 지옥(地獄)을 연상했고, 미군이었다는 것이 정말 부끄러웠다.

 

죽을 고비, 처참하게 죽은 동료들 그리고 이런 미군의 행패들이 현재 PTSD를 발생케 했다. 악몽을 꾸거나 하는 고통은 없으나, 자주 고독해지고, 우울해지며 극한 슬픔을 느끼곤 한다. 1952년 1월 한국을 떠났고, 돌아와 대학에 복학하여 회계학을 전공했다.

 

한국전쟁에서 얻은 가장 큰 교훈들은, 먼저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관계’라는 것이다. 돈이 인생에 중요한 가치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중요한 것은 사람다운 관계, 우정, 친밀하고 진실한 사람들 간의 관계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그것 때문에 한국전쟁에서 돌아왔을 때는 정말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한국에서 돌아오자마자, 약혼녀와 결혼을 했지만 돌아와서 달라진 사람됨과 결혼 전의 관계 상에 괴리가 있는 것을 느꼈고, 그로 인해 아내와 많은 불화가 있었고 결국 이혼하게 되었다.

당시 서울을 한두번 가 보았는데, 모든 것이 파괴되었었고, 사람들은 정말 불쌍한 처지에 있었다. 한국전쟁하면 생각나는 것이 열악한 상황에서 엄청난 고통 속에 있었던 한국 사람들이 생각난다.

 

또 생각나는 것은 한국은 당시 거대한 진흙덩이같은 느낌, 그리고 논과 밭, 산이다.

그런데 이제 한국은 정치, 경제, 사회 각 분야에서 엄청난 발전을 하였고 다른 나라의 귀감이 되고 있다. 나는 현재 뉴욕의 현대미술박물관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데, 그곳을 방문하는 한국 사람들이 내가 참전용사라는 것을 알고 감사함을 표할 때마다 보람을 느낀다.

 

 

 

▲ 최근 한국을 방문한 자리에서 딸 게일과 아들 미첼과 함께 한 모습

 

 

딸 게일 로빈(Gale Robyn) 그리고 아들 미첼 리버만(Mitchel H. Liberman)과 함께 며칠 전 한국을 다시 찾았다. 딸은 한국전쟁에 관해 얘기를 잘 듣지 못했지만 아들은 항상 나를 따라다니며 전쟁 경험을 듣고 질문하고 했으며, 전쟁 중에 입던 군인 자켓을 닳도록 입었다.

 

아들 딸 모두 아버지가 싸운 그리고 희생한 이 나라가 이렇게 발전한 것을 보며 아버지가 자랑스럽다고 입을 모았다. 이번 재방한이 가족과의 관계를 더욱 끈끈하게 만드는 기회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인류가 서로 평화공존하지 못하고 서로 살생하는 것은 정말 엄청난 낭비라는 것이다. 그것이 전쟁으로부터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이다.

 

인터뷰/ 한종우 한국전참전용사 디지털기념관재단(www.kwvdm.org)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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