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혹했던 포로생활’ 아든 로울리(Arden Rowley) ③<한국전쟁
by 한종우 | 14.06.26 06:50


 

 

 

 

1930년 6월9일 아리조나 주의 피닉스에서 출생하여 메사(Mesa)로 이사온 후 줄곧 이곳에서 생활했다. 1948년 5월28일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에 자원입대하여 캘리포니아에서 2개월간의 기본 군사훈련을 받은 후, 1949년 1월 오키나와로 배속되어 그곳에서 15개월을 근무한 후 1950년 초 미국으로 돌아와 워싱턴 주의 포트 루이스(Fort Lewis) 제 2사단에서 근무했다.

 

당시 한국에 대해 전혀 아는 것이 없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1950년 7월17일 2사단이 MM Patrick호를 타고 한국으로 떠나 7월31일 부산에 도착한다. 배안에서는 소총 사격, 무전기, 기관총과 그 때 처음으로 소개되었던 바주카 포 등의 각종 훈련이 이루어졌다.

 

당시 부산은 정말 별것 없는 도시로 항상 피난민들로 붐볐고 한국인들은 항상 지게나 머리위에 많은 것을 지고 다녔다. 1950년 9월2일 낙동간 전투에 참여되어 소대장의 지프차를 운전하였다. 그날부터 적에 대한 대대적 공세를 퍼부었는데, 소대장 차를 타고 적의 탱크 T-34를 유인하여 바주카 포가 적의 탱크 5대를 파괴하기도 했다. 바주카 포는 이때 만들어 진 것으로 탱크를 파괴한 것은 이 때가 처음이었다.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한 후에는 북한군을 도주하기 바빴고, 수원, 서울, 영등호, 그리고 평양으로 소대장 지프차를 몰고 진격하였다. 평양 점령한 후에는 밥 홉프가 평양으로 와서 공연하기도 하였다.

 

소대장 지프를 운전하였기에 다른 일반 병사들 보다는 여러가지 면에서 유리했다. 10월에서야 겨울용 보급품이 지급되기 시작했는데, 운이 좋게도 보급품을 배정받아서 위 아래로 몇 겹씩 끼워입기도 했다. 그러나 많은 다른 병사들은 그런 호강(豪强)을 하지 못했다. 당시 2사단 사령관이 한국전쟁의 역사적 의의에 관한 글을 배포해서 왜 한국에서 무엇을 위해 싸우는 지에 대해 명확히 알고 있었다.

 

청천강을 넘을 때 중공군이 진입하여 후퇴하며 모든 보급품과 무기를 파괴하면서 철수 했는데, 1950년 12월1일 중공군 8명에게 생포됐다. 체포되는 순간 낙동강 전투에서 미군 포로를 사살하던 북한군 생각이 들었는데, 중공군은 북한군만큼 악랄하지 않았고, 조사도 받지 않았다. 24일 동안 밤에만 행군하여 포로 소용소에 도착하게 된다. 12월2일은 어머니 생일이어서 더욱 슬펐다. 그러나 1951년 7월까지 어머니는 아들이 포로가 된 것을 알지 못했다. 1월에 쓴 편지가 그 때야 도착한 것이다.

 

많은 동료 포로들은 먹지 못해 배고파 죽거나 또는 이질 같은 악성 전염병에 걸려 많이 죽게 되었다. 한 터키 병사 포로는 군화가 너무 찢어져 동상에 걸렸고, 자신이 신고 있었던 oversize 군화를 벗어주어 부어 오른 발을 구할 수 있었고, 그 터키 병사는 고마워서 자신에게 무릎 꿇고 발에 키스를 하기도 하였다. 상관이었던 상사는 동상에 걸려 발을 자를 수 밖에 없었는데, 나뭇가지를 전지하던 칼로 발을 마취없이 잘라냈다. 포로 수용소 전 생활 중 다행히도 살아 남아서 휴전 후 석방되어 미국에 돌아왔으니 그래도 행운아라고 해야 할 것이다.

 

 

 

 

 

◆ ‘데스밸리’ 죽음의 수용소에 갇히다

 

 

1950년 12월25일 압록강 남쪽 40마일 지점의 광부들이 지내던 시설이었던 포로수용소에 도착하게 되는데, 그 수용소가 데스 밸리(Death Valley)로 불리운 이유는 2주반동안 병과 굶주림으로 250명에서 300명이 죽어갔기 때문이었다. 1951년 1월말 벽동 포로수용소로 이감(移監)된다.

 

1951년 7월부터 포로들에 대한 대접이 나아졌다. 석방될 경우 중공군이 가혹한 행위를 했다는 비난을 받지 않기 위해서였고, 또 한가지 이유는 공산주의가 자본주의보다 낫다는 이념교육을 시키기 위해 그나마 식량도 지급하였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세뇌공작(洗腦工作)은 호주 출신의 Wilfred Burchett이 전담하였다. 이 세뇌교육을 받는 포로에게는 담배를 지급하는 유인책을 썼는데, 이질로 고생하는 같은 방 동료가 담배를 간절히 원해서 대신 출석하고 담배를 받아 주기도 했다. 그 세뇌 수업은 하루에 8시간 강행군으로 이어졌다. 벽동 포로수용소는 중공군이 전부 관리하였는데 고문은 없었다.

 

1952년 1월 어머니에게로 부터 편지를 받았고, 인터뷰 중 어머니에게서 온 편지를 읽으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하였다. 그리고 1952년 봄 부터는 중공군이 세뇌수업을 중단하였다.

 

8월14일 기차로 벽동에서 개성에 도착하였고, 3일간은 파티가 계속되었다. 7월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된 날 휴전의 성립과 석방될 것을 통보받았고, 8월14일 벽동에서 떠나 8월15일 개성에 도착하였고, 8월18일 ‘Gateway to Freedom’ 이라는 간판을 보며 서있던 미군 트럭을 봤을 때 정말 석방되어 자유를 되찾았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공산주의를 따라간 21명의 동료 포로들도 있었다. 1953년 샌프란스시코에 돌아와 가족들과 함께 이틀간 자동차여행을 통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한번도 포로 생활을 한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았다. 오히려 핸드폰, 조선 등에서 전 세계를 리드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발전에 기여하고 공산주의로 부터 한국을 막아낸 것에 대한 굉장한 자부심 속에서 산다.

 

1950년 당시 1개의 다리만이 남았고 그것마저도 미군이 건설한 것인데 이제 30개가 넘는 다리가 있는 한국 그리고 밤에는 깜깜한 북한의 위성사진이 한국전쟁과 참전용사의 유업의 상징이다. 북진(北進)하여 북한까지 통일하지 못한 것이 매우 아쉽다. 정치인들의 말을 듣지 말았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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