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우석 박사를 만나고자 하는 사람들과 황 박사의 강연 내용을 원하는 사람들의 수효(數爻)가 나날이 늘어만 갔다. 그들에게 마땅히 해 줄 일이 없는 내 처지로서는 그들의 사정을 잘 적어 두었다가 황 박사에게 이메일로 알리는 일, 그리고 여성포럼 행사에서 강연한 황 박사의 강연을 테입으로 만들어 원하는 사람들에게 보내 주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보내기 전에, 여성포럼 행사를 적극적으로 도와 준 사람들에게 먼저 보냈는데, 행사를 적극적으로 홍보해 주고, 좋은 기사를 써주었던 ‘스포츠서울’의 노창현 기자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황 박사의 강연 모습과 내용은 나중에 영화감독 이현철의 도움으로 DVD로 제작되어 한동안 많은 이들에게 보급되기도 했다.
행사가 끝나고도 오랫동안 다시 내 본업으로 돌아오지 못할만큼 황우석 박사가 신드롬으로 자리잡을 때, 황 박사가 하룻밤 새에 세상이 깜짝 놀랄 사기꾼으로 전락(轉落)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나는 이 분야에 문외한(門外漢)이었지만, 행사를 주최한 것이 계기가 되었는지 ‘황우석사건’에 대해 인터뷰를 하자고 언론사들이 덤볐다. 그 무렵 나와 인터뷰를 하고자 했던 기자들에게 인터뷰를 거절하면서 말했듯이 황우석 박사에 대한 내 마음은 지금도 똑같다.
첫째, 내가 황우석교수를 초대할 때 그는 ‘세계를 놀라게 한 과학자’가 아니라 원칙에 입각해 하루를 맑고 풍요롭게 사는 교수였기에 연사(演士)로 초대했다. 과도기에 있는 한인사회에 황우석이라는 인물이 롤 모델이 되었으면 했다.
둘째, 여성포럼행사에 황 박사가 올 무렵 경호원들이 동행할만큼 그의 명성은 위세를 떨치고 있었지만, 내가 초대할 때 보았던 겸손(謙遜)을 그대로 유지했던 교수였다. 그리고 “행사에 꼭 가겠노라”던 약속을 지킨 책임감 있는 사람이다.
셋째, ‘남보다 앞질러 연구결과를 발표하고 싶어 악마에게 영혼을 판 거짓말쟁이’가 된 황우석 박사를 비난할 수 없는 것은 지구 위에 발 딛고 사는 사람들이라면 그 누구나 자신의 이익 앞에는 모두 인사불성(人事不省)이 되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종교지도자들도 벗어 버릴 수없는 그 무서운 이기심에서 비롯된 우리 인간의 약함이야말로 세상을 아롱다롱 살맛 나게 하는지도 모른다.
‘황우석사건’이 없었다면 좋았겠지만, 황우석 박사를 초대한 이유로 내게 연락을 준 사람들은 내가 사는 이유를 완전히 바꿔 놓았기에 황우석 박사는 내게는 더없이 고마운 사람이다. 황우석 박사의 연구에 희망을 걸고 그를 만나고 싶어 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면서 예기치 않은 불행을 만난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의 사연은 곧 나의 회개(悔改)로 이어졌다.
모르는 말이 없고 못하는 말이 없는 내가 그들을 위로해 줄 수 있는 말을 찾지 못했고, 그들의 하루, 그들의 가족이 겪는 고통에 나는 오열(嗚咽)했다. 특히 내가 아는 C가 오토바이사고로 10년 째 누워 있다는 그이 누이의 말에 할 말을 잊었다. 틈만 나면 C가 볼 수 없는 곳에서 통곡(痛哭)을 한다는 C의 어머니와 눈물로 젖어 버린 C의 가족들.
“명문대갓집 마나님이면 무슨 소용있겠니? 밤마다 강가에 나가 한바탕 울고 들어 와서도 침대에 시체처럼 누워 있는 C를 보면 입을 막고 또 우는 이제는 빈털털이가 된 초라하기 짝이 없는 우리 엄마. 정말 우리가 왜 살고 있는지 모르겠어!”
한때 그렇게 이뻤던 C의 누이는 이제 그 형체를 찾아 볼 수 없게 늙고 수척(瘦瘠)해 보였던지라 그녀를 보는 내 가슴이 너무 쓰렸다. 그리고 약혼 전에 당한 사고로 누워있는 C를 한결같이 간호하는 여성을 보며 나는 사는 궤도(軌道)를 수정하기 시작했다.
내가 만난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이다. 내가 들은 하느님의 음성은 “내가 세상 끝날 때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복음 28: 20)”이다.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기. 내 손이 필요한 곳에는 서슴지 말고 달려가기. 내 영세명이 베로니카이듯 피고름을 흘리는 사람들에게 달려가 손수건으로 닦아 주며 이름값을 하며 살기.
2004년 행사이후 시간은 또 다시 그렇게 흘렀다. ‘황우석사건’이 언제 있었느냐는 듯 그 일도 잠잠해졌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던 ‘원더우먼’도 ‘정말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를 가슴에 새기고 살고 있던 어느 날, 맨하탄에서 열린 사찰 음식제에 갔다.
▲ 2010년 사찰음식제를 위해 뉴욕에 왔던 사찰음식의 대가 스님들
2010년 9월이었다. “한 숟갈의 밥알이 하나의 세계를 이루고, 한 상 가득 차려진 밥상에 우주의 기운이 스며있다”를 내게 가르쳐 준 사찰음식의 대가들이 대거 참석, 사찰음식제는 대성황(大盛況)이었다.
▲ ‘열두달 절집밥상’의 저자인 대안스님과 함께
음식제에 셰프로 온 대안 스님을 만나기 위해 내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서는데 바로 내 뒤에 앉아 있는 낯익은 남자의 얼굴. 나도 모르게 저절로 “노창현 국장님?”하고 불렀다.
뭔가를 쓰던 노창현 기자도 고개를 들며 금방 나를 알아보았다. 참으로 즐거운 자리에서 만난 축제같은 만남이었다. 그는 요즘 ‘뉴스로’라는 웹진을 운영하고 있다며 한번 살펴 보라고 했다. 글 쓰는 사람을 만나면 절대 놓치는 법이 없는 그인지라 바로 다음 날 ‘뉴스로’를 훑어 보았느냐?는 전화가 왔다. 물론 나도 사찰음식제에서 돌아오자마자 ‘뉴스로’를 훑어 보았노라 답했다.
칼럼형신문이니만큼 기사가 많아 다 읽어 보진 못했으나 ‘뉴스로’가 어떤 신문이든 글을 쓰겠다고 했다. 노창현 기자는 모르고 있겠지만, 그가 부탁을 하기 전에 나는 이미 그의 부탁이라면 뭐든지 해주겠다고 지난 7년간 벼르고 살았다.
언젠가 내가 보낸 황우석 박사의 강연 전문(全文)을 소개하기 위해 토씨하나 빼놓지 않고 옮겨 적었다는 얘기를 지인에게 듣고 깜짝 놀랬거니와, 그 얘기를 들으며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일본의 한 승려가 콩 한 알에 불경(佛經)을 옮겨 썼다는 일화(逸話)가 생각났다. 그저 얘기로만 듣고 찾아보지는 않았지만, 나는 노창현 씨에게 늘 갚아야 할 빚을 진 기분이었다.
2004년 행사이후 노창현 기자가 황우석 박사의 연구에 대한 기대와 인간 황 박사를 진심으로 자랑스러워 하며 썼던 기사를 생생하게 기억하기에 나도 ‘뉴스로’를 위해 뭔가를 하고 싶었다.
노창현 씨와 말을 마치자마자 시작한 글이 이제는 제법 쌓였고, 내 글을 쓰며 읽게 된 다른 이들의 글이 매우 흥미로웠다. 한국을 비롯해 전 세계를 돌며 글쟁이들이 있다면 정박(碇泊)하는 배처럼 ‘뉴스로’는 세상을 돌며 글로 우리들의 마음을 묶고 있다.
열심히 사는 일에 내공을 쌓는 사람들의 모습에 나 역시 오늘을 살아 낼 기운을 얻는다. 한때는 참 지겨웠던 사람들, 내게 상처를 준다고 생각했던 사람들로부터 새로운 위안을 얻는다.
그리고 너무너무 다행인 것은 ‘뉴스로’라는 배위에 올라 탈 무렵, 내 마음이 가벼워져 무게를 싣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다. 만나지 않고도 이미 만난 것처럼 아니 아주 오래 알고 지내는 사람들이 되어 버린 ‘뉴스로’ 필진들 그리고 노창현 대표.
나는 그들을 언제 어디서 만나도 손을 덥석 잡을만큼 내 마음이 열려 있다. ‘뉴스로’에 글쓰는 이들이 내게 준 자유다. 가식(假飾) 없이 본래의 목소리로 노래하라고 용기를 준 그들이 가족이 된 사연을 얘기하기 위해 ‘승선기(乘船記)’는 이렇게 길고 긴 글이 되었다.
▲ 지난 1월에 첫 모임을 가진 ‘뉴스로’의 뉴욕 필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