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년을 산 나비 한 마리가
내 손에 지친 몸을 앉힌다.
천 년 전 앙코르와트에서
내 손이 바로 꽃이었다는 것을
나비는 어떻게 알아 보았을까.
그 해에 내가 말없이 그대를 떠났듯
내 몸 안에 사는 방랑자 하나
손 놓고 깊은 노을 속으로 다시 떠난다.
뜨겁고 무성하고 가난한 나라에서
뒤뜰로만 돌아다니는 노란 나비.
흙으로 삭아가는 저 큰 돌까지
늙어 그늘진 내 과거였다니!
이제 무엇을 또 어쩌자고
노을은 날개를 접으면서
자꾸 내 잠을 깨우고 있는가.
하루에 한 번씩 읽어 보는 마종기 선생의 시, ‘캄보디아 저녁 1.’-시인의 언어를 흉내조차 낼 수 없기에 그의 마음을 훔치고 있는 셈이다.
“마종기씨가 그 빠듯한 스케쥴에도 한동신을 잊지 않고 챙기더라”며 시화전에서 만난 김정기 선생이 마종기 시인의 시집, ‘우리는 서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를 건네주는 면전에서야 “헤헤, 마종기 선생님을 사랑한 것이 짝사랑만은 아니었나 봐요!”하고 살살거렸지만 사실은 시집을 받고는 혼자서 껑충껑충 뛰었다.
시화전이 열린 뉴저지에서 맨하탄으로 돌아오는 밤길은 앞이 보이지 않을만큼 눈이 내렸지만, 하염없이 달리는 차 속에서 시를 읽노라니 내 젊은 날이 피어 올랐다.
▲ 어차피 서로를 다 채워 줄 수없는 것/ '꿈꾸는 당신'
황동규의 시에 자주 등장하여 알게 된 마종기 시인. 그의 시집 ‘안보이는 사랑의 나라’를 단짝인 민은경과 자주 읽곤 했다. 우리는 그의 시를 사랑했고 미국에 살고 있다는 마종기 시인을 흠모(欽慕)했다.
다른 애들이 배우 사진을 책갈피에 꽂아 놓고 가슴앓이를 할 때, 나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과일사탕껍질에 마종기 사진을 넣어 김수영 시집에 끼워 두었다. 김수영 시집을 펼치면 향긋한 과일사탕향기를 비집고 시인 마종기의 얼굴이 서서히 드러났다.
▲ 시인 마종기 (사진출처: 마종기시인)
까만 별같은 시인의 눈, 비스듬히 뉘인 고개 옆으로 그의 콧날은 날카로왔지만 섬세하게 솟아 있었다. 내가 그의 사진을 한없이 들여다보며 “아, 아 ~!” 거리면 착하디 착한 내 친구 은경은 내가 애송(愛誦)하는 시를 천천히 읽어주곤 했다. 그래서 지난 봄, 뉴욕문화원에서 마종기 선생의 강연에서 돌아오자마자 서울에 사는 은경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아-아- 마종기! 그간 뉴욕에 여러 번 오셨다는데 이제야 만날게 뭐야? 스스로 할아버지라셔. 근데 여전히 소년같기에 글쎄 내가 여고생처럼 내숭을 떨다가 급기야 내가 마 선생님 사진을 보며 얼마나 가슴앓이를 했는지를 말해 버렸어. 그랬더니 내가 들고 있던 마 선생의 수필집에 그 분이 뭐라구 적었는줄 알어?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마종기-’ 진짜 우와아~~~지?”
▲ 헤어져 본 사람만은 안다. 수척한 겨울/ '몬태나 평원'
나의 환성, 나의 불평, 나의 절규를 받아 주는 내 친구 민은경이 방송국 프로그램의 국제화를 홍보하기 위해 뉴욕에 왔었다. 행사준비로 정신이 없는 그녀의 소매를 끌어당기며 내가 제일 먼저 그녀에게 마종기 시인이 내게 준 시집 ‘우리는 서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를 들이밀자 암말 않고 씨익 웃는다.
▲ 당신이 보고 싶어 여기 왔다가 간다/ '포르투갈 일기 2'
그 미소에는 풋풋한 우리의 젊은 날이 담겨 있고, 이제 남아 있는 날들도 함께 가고 있는 아름다운 노을이 번진다. 은경의 눈동자에 나는 그녀가 천 년 전에 보았던 꽃으로 피어난다. 은경은 내 마음에 내가 천 년 전에 묻어 두었던 꽃자리에 다시 꽃으로 피고 있다. 천 년 전에 보았던 꽃자리에서 우리는 이렇게 서로를 부르고 있다.
▲ 너무 아름답고 빛나서 보이지 않는 시/ '잡담길들이기 7' 사진: 한동신 인용싯구: '우리는 서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