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만 되면 마음 한구석이 허전해진다. 한동안 10월초만 되면 카드와 조그만 선물을 챙겨 신상옥(申相玉) 감독님의 생신(生辰)에 맞춰 보내곤 했는데, 감독님이 세상을 뜨신 지도 어느 새 5년이나 되었다.
개인적인 만남이라기보다는 일로 만난 사람의 부음(訃音)을 듣고 하루 종일 엉엉 울어 보기는 아마 신상옥 감독이 처음이리라...
한국영화계의 거인답게 내게 짙은 인상을 남긴, 그리고 내가 영화를 공부한 보람을 안긴 신상옥 감독을 처음 뵌 것은 1996년 현대미술박물관(MoMA)과 내가 공동으로 기획한 ‘신상옥, 유현목, 임권택: 한국영화 3인의 거장’을 위해 뉴욕에 오셨던 때였다.
그 때는 행사진행에 뛰어 다닐 때라 신 감독님과 개인적으로 얘기할 기회가 없었다. 그 이후 2002년 또 한번 ‘신상옥감독 회고전’을 열었을 때 다시 뉴욕을 찾은 감독님 내외분과 아주 특별한 2주간을 보냈다.
뉴욕에서 맺은 인연(因緣)으로 감독님 내외분과 함께 다른 프로젝트를 함께 하며 ‘과연 신상옥, 최은희의 명성(名聲)에 걸맞게 대단한 분들이구나!’를 실감 할 수 있었다.
회고전의 기획자이긴 했지만 사실 신상옥 감독에 대해 내가 알고 있었던 것은 가물거리는 기억의 한 귀퉁이에서 스캔들이나 그 이후 북한에 납치(拉致), 탈북(脫北), 그리고 어쩌다 영화인들에게 듣는 감독님에 대한 에피소드가 전부였던지라, 신상옥 감독은 내게 ‘스핑크스’였다.
그러나 회고전(回顧展)을 준비하면서 신감독이 만든 영화를 찬찬히 보며 놀라운 연출력에 감탄했다. 특히 신 감독의 데뷔작이자 그의 나이 스물 여섯에 만든 ‘지옥화(地獄花)’는 하모니카 하나로 백 뮤직을 처리한 젊은 감독 신상옥이 배짱으로 만든, 완성도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10원이 있으면 10원으로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기염(氣焰)은 신 감독이 생을 마칠 때까지 실천한 정신이다.
회고전은 거의 2년에 걸친 작업이었다. 그때 서울로 정착지를 옮기신 감독님은 사방에 흩어져 있는 자료들과 필름들을 정리하느라 직접 뛰어 다녔다.
고군분투(孤軍奮鬪)하는 감독님이 안쓰러워 다른 사람들을 시키면 “아니야, 내가 할거야. 나도 오래간만에 나를 다시 보는 것 같아. 힘든 것 없어”하셨다.
뉴욕에 최은희 씨와 함께 오신 감독님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준수한 용모(容貌)와 뭔지 모를 의미가 감도는 미소(微笑)로 보름이나 되는 영화제를 거뜬히 치르셨다.
한국영화계의 거목(巨木)이며 키 또한 크신 감독님이 뒤에서 두어 발자욱 떨어져 졸졸 따라 다니는 나는 항상 뒤쳐지곤 했다.
그런 분이 주변에 사람들만 없으면 눈을 감고 계셨고 “신 감독이 지금 머릿 속으로 ‘칭키스칸’ 시나리오를 고치고 있는 중”이라고 최은희 씨가 내게 속삭였다.
‘칭키스칸’은 감독님이 이북의 어느 감옥(監獄)에서 5년간 갇혀 있을 때 머릿 속으로 쓰신 시나리오였고, 뉴욕에서 일정이 끝나는대로 할리우드 프로듀서들과 미팅을 앞두고 계셨다.
평소에 말씀이 없으신 감독님이 “그게 말이야-”일단 말문을 열었다 하면 이광수와 미켈란젤로가 쇼팽과 찰리 채플린이 한데 어우러져 대하(大河) 드라마가 되었다.
감독님의 매끈한 화술(話術)과 해박한 지식에 매료(魅了)된 내가 ‘신상옥’에 따라 다니는 가십과 수수께끼같은 일화(逸話)들에 대해 습격하자 마치 옛날 얘기를 하시듯 자상하게 설명해 주셨다.
과거의 연인이었던 여배우에 대해서는 “응, 그건 참 잘못된 일이었어. 그런데 자네, 내가 좀 모자란 사람이라는 것은 알지?”하셨다.
감독님은 정말로 자신을 모자란 사람으로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어디나 최은희 씨랑 가지 않으면 불안한 자신, 영화만 생각하고 산 한 평생, 그 뒷전에 밀어 놓은 사람들에 대한 회한(悔恨), 실크양복을 입고도 분수대에 앉아 물장난을 하고 싶은 치기(稚氣)-’신상옥’이라는 거목이 드리운 그림자의 그 가운데는 소년의 원형(原形)이 자리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공전(空前)의 힛트를 친 뮤지컬 ‘파리의 노트르담’ 공연 유치(誘致)를 위해 감독님 내외와 파리에 갔을 때 그 빠른 걸음으로 어느 골목에 들어 선 감독님은 어서 오라고 손짓하셨다.
“저기 보이는 건물 뒤에 가면 싸구려 여인숙(旅人宿)이 있단다. 최(은희)여사가 어디로 사라졌는지도 모르겠고 호주머니에는 몇 푼 없이 어디로 가야하나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때 무작정 파리에 와서 들어갔던 여인숙이 저기에 있어.”
빠르게 말을 마치고 휙 돌아 서서 가는 감독님의 뒷모습이 사막(沙漠)을 홀로 걷는 칭키스칸 같아 가슴이 너무 아팠다. 허공(虛空)을 향해 손가락으로 가르치던 그 여관은 이제 없어 졌을지 모르지만 감독님 가슴에는 남아 있는 듯 했다.
잊고 싶은 기억(記憶)을 간직하며 잊어야 할 사람을 가슴에 묻고도 소리 없이 웃고 사는 사람, 내가 본 신상옥 감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