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과 깨달음
by 차크라 | 10.07.07 08:09
 
 
 
 

얼마 전 美대륙을 달리기로 횡단한 권이주 뉴욕한인마라톤클럽 회장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작고 깡마른 체격에 대륙을 건너오느라 검게 타기까지 한 그의 모습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해맑은 웃음이었다. 환갑을 넘은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웃음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그의 모습에서는 세속을 떠난 수도자의 풍모도 언뜻 풍긴다. 인당(印堂) 부위를 보니 제3의 눈이 열려있다. 대륙횡단 마라톤 출발 전에 그를 직접 본 적이 없으니, 원래부터 그랬는지 이번에 극한경험을 통해 생긴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

 

내가 직접 경험해 본 적은 없지만,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라는 단계가 있다고 한다. 마라톤 주자가 레이스 도중 일정 단계에 이르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저절로 달리게 되며, 자신의 몸이 사라지고 뛰는 자와 이를 바라보는 자신만 남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명상수련 도중 입정(入定)에 드는 것과 유사한 현상이다.

마라톤은 철저하게 자신과의 대면이다. 권이주 회장은 매일 마라톤 풀코스의 한 배반 되는 거리를 석 달 넘게 달려왔다. 그 기간 동안 자아 성찰을 통해 내면 탐구가 깊어졌을 것이며, 그것이 해맑은 웃음을 갖게 된 요인이 아닌가 싶다.

물론 나는 아직까지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었다는 마라토너에 대해 들어본 적은 없다. 그것은 아마도 그런 사람들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거나, 마라톤을 그 단계에 이르는 것은 어렵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렇지 않다면 전 세계의 수많은 마라토너 중에 한 소식한 이가 몇은 나왔어야 되지 않을까.

육체적 고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자 한 사람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과거부터 있어왔다. 깨달음의 스승인 고타마 싯다르타, 우리가 흔히 부처님이라고 이르는 분도 마찬가지였다. 그 시절 싯다르타는 당대 최고 수준의 요기였다. 당시 수행계의 트렌드는 고행이었던 모양이다.

싯다르타도 극한까지 자신을 몰아붙였다. 어찌나 강렬하게 고행을 했는지 파키스탄과 인도의 접경지역에 있는 ‘라호르’의 박물관에는 붓다고행상이 있을 정도이다. 피골이 상접하고 눈이 움푹 들어간 그 조각상을 보고 있노라면 그 강렬함에 충격을 금치 못한다.

그런데 싯다르타는 고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 고행을 통해 육체를 넘어서고자 한 것이 오히려 육체에 집착한 결과가 된 것이다. 그것을 깨닫고 난 후 싯다르타는 보리수 아래에 앉아 궁극의 깨달음을 얻어 붓다가 됐는데 그것은 고행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방법은 Vipassana(비파사나, 위빠사나)라는 수행법으로 현재까지 전해온다. 그 핵심은 ‘깨어 있음’이다. (이 수행법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다루도록 하겠다.)

깨달음의 스승들은 하나같이 내면의 탐구를 강조한다. 내면을 탐구하는 방법은 가부좌를 틀고 앉는 것만이 아니다. 중국 전국시대 위나라의 포정은 소 잡는 백정이었지만 칼질을 통해 도(道)를 얻었다.

러너스 하이에 도달하려면 육체적 고통과 일정 시간을 요한다. 요즘처럼 바삐 돌아가는 세상에 깨달음을 얻기에는 덜 효과적인 방법일 수는 있겠으나, 일반인에게는 적당한 달리기가 내면을 성찰하고, 더불어 건강까지 얻을 수 있는 최고의 프로그램 중 하나라고 본다.

꼭 달리기가 아니더라도, 빠르게 걷기나, 천천히 걷기 등도 좋은 운동이자 사색 프로그램이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깨어있음’인데 이것은 긴장된 상태의 각성이 아니라, 이완된 상태의 자각이다. 이것이 되지 않으면 훌륭한 사색가가 될 수는 있어도, 훌륭한 수행자가 되지는 못한다. (뭐 굳이 수행자가 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권이주 회장의 내면 체험 경지를 알 길은 없지만, 첫마디가 “인생은 꿈”이라는 것, 원효대사의 예를 들며 “생각(마음)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미뤄 짐작해볼 수는 있다.

티벳에서 오체투지를 하며 라싸까지 가는 가족을 만난 적이 있다. 출발지가 어디인지 모르겠지만, 몇 개월을 기어서 가는 그 노력은 미대륙횡단 마라톤에 못지않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들에게서도 같은 종류의 미소를 본 기억이 난다. 세속의 물욕을 떨쳐버린 순수한 웃음.

 

세상일에 너무 찌들어 있다고 느낀다면 운동화 끈을 조여매고 몸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아무 생각 없이 뛰어보자. 사실 아무 생각 없는 단계에 이르기까지는 너무나도 많은 생각이 일겠지만, 그것은 나중에 해결책이 있으니 지금은 그냥 뛰는 것부터 시작하자.

by 유정선 2016.01.10 11:19
이 글을 보니 가슴이 찡 합니다. 어린시절부터 해오던 무용...대입때 지독하게 연습하던때가 떠올라요. 발레토슈즈에 엄지발톱과 새끼발톱은 이미 빠져버리고 하루하루 고된 연습과 훈련으로 온몸이 너덜너덜거리며 보내던 시절이 있었는데 어떤날은 이제 몸의 고통이 극에 달한뒤 어느 순간 평온함을 느꼈습니다. 몸은 말할 수 없이 새털처럼 가볍고, 저는 그고통스런 몸을 떠나 저 자신의 춤추는 모습을 보고 있더군요... 그리고 세월이 흘러 한해의 마지막날 절에서 1000배를 태어나 처음 할때도 고통의 극한에 이르고 그 순간이 지나자 몸과 마음이 분리되어 평온함을 느끼고 마음속에 깊은 환희가 떠오르더군요...이 글을 읽으니 그때의 일이 생각나요...바로 내일 운동화 끈을 묶고 밖으로 뛰어 나가 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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