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운으로 가득찬 집 <中> 기러기 엄마 생활 7년차
by 최경자 | 14.08.07 11:57

 

남아공에 온지 4년차 되던 2011년은 악몽(惡夢)처럼 다시 생각하고 쉽지 않은 나날들이지만 이야기를 하고 넘어 가야 할 것 같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오해로 풀지 못한 관계 그대로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2010년 12월에 우리 가족 4명과 조카 2명, 도합 7명이 모두 한국 방문길에 올랐다. 형편이 좋지 않다는 제부(弟夫)의 말에 조카 둘을 남아공에 두고 갈 수가 없어서 그 당시, 조카도 한 명 비행기 삯을 대어 주고 모두가 한국을 방문 할 수 있었다.

 

 

 

 

 

한국으로 출발하기 전, 나같은 기러기 엄마들을 도와주겠다고 살림 60kg를 운반하는 바람에 애들에게 편치 못한 여행을 시작하게 했다. 거기에서 배운 것이라면 나 혼자만 희생하는 일이 아니라면., 공동을 위해서는 자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출국하던 날, 클레어먼트 하우스에서 애들이 가든에 거름을 만들겠다고 귤, 사과 과일 찌꺼기를 땅속에 묻느라 약 1미터 가량을 팠다. 그런데.., 애들이 땅 속에서 사람 뼈가 나왔다고 야단들이었다. 비행기 시간에 쫒겨 애들 말을 무시하고 떠났다. 집 주인은 호주에 사는 사람이었다. 호주에 있으면서도 엄격하게 세입자를 선정했다. 우리가 이사간 후에도 세입자가 몇 번 씩이나 바뀌었으니까.

 

당시 그 집에서 4년째 살았는데 그해 겨울 한국 방문 하던 한 달 동안은, 가는 곳마다, 죽은 사람과 귀신 이야기가 많이 올랐던 기억이 난다. 몇 년 만에 상봉한 가족이건만, 큰 딸과 아빠가 마찰을 불러 일으키게 만들었다. 큰 딸 때문에 힘들게 살았다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은 묘한 감정이 생긴 것이다. 딸의 장점보다는 단점을 더 앞세운 것 같다. 그것은 차라리 남보다 못한 엄마의 행동이었다.

 

1년 가까이 지난 뒤에, 큰 딸의 방을 청소하다가 우연히 일기장을 볼 수가 있었다. 몇 개만 읽어 보았는데.., 만약에 내가 진짜로 그랬다면 계모(繼母)보다 못한 엄마였다. 그것을 읽고 한참 동안 울었다.

 

매번 한국 방문할 때마다 어머님은 50만원을 주셨다. 필요한 것을 싸 가지고 가라고. 그 해에도 어김없이 받았고 생필품과 식료품으로 다 써버렸다. 그런데 반도 못 가지고 오는 일이 발생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부녀지간의 다툼으로 비행기를 놓치는 일이 발생하게 되었고 할 수 없이, 큰 딸을 빼고 5명만 오게 되었지만 우리 역시 비행기를 타는 날, 뭔가에 홀린 듯한 나의 판단 미스에 남편과도 작별 인사 한번 제대로 못한 채 비행기 이륙 10분전에 타게 되었다.

 

남편은 공항에 먼저 와 있었다. 구입한 물건이 남편 차에 한 가득 실려서 우리는 대중교통을 이용해야만 했다. 5년만에 이용한 대중교통에 어둡기도 했지만 애들도 전철을 둘러 다니고 호떡과 군것질을 하며 늦장을 부려 공항에 늦게 간 것이다. 남편은 발을 동동 구르고 공항에는 도착했지만 모두가 떠난 뒤였다.

 

다음 비행기를 이용하라는 직원에 말도 무시하고 무리해서 비행기를 탔다. 구입한 물건은 반도 못가지고 왔고 남편과 제대로 작별 인사도 못한 채.., 비행기에는 탔지만 다시 내리고 싶은 마음이 열두번도 더 들었다. 심지어, 뛰어 내리고 싶은 충동감으로 비행기에 앉아 있지를 못했다. 다음 비행기를 타라는 남편의 만류(挽留)도 무시하고 억지 탑승한 것이다.

 

물론 남편의 스케쥴에 변동을 주지 않고 싶었고 가족수가 많은만큼 페널티 비용이 크다는 이유였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생각이 짧았다. 그 순간 판단으로 인해, 돈이 문제가 아니라., 몇 날을 후회하며 울었으니까.

 

게다가 황급하게 오는 바람에, 다른 사람 부탁을 받은 중요한 문서도 분실하고 말았다. 언제 흘렸는지., 비행기에 탑승하고 보니 중요한 서류가 없었다. 지금이라도 포기하고 나갈까???!!! 미친 여자처럼 혼자서 중얼댔다. 비행기 안에서 앉은 18시간은 18일간 관(棺)속에 갇혔다가 내린 듯이 너무나 숨막혔다. 도착한 뒤에도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을 수도 없었고 후회감에 가슴을 쳤다.

 

다음 비행기에 몸을 실은 큰 딸이 도착하고 나서야 고통스러운 마음에서 간신히 벗어날 수가 있었다. 다음 비행기를 탔더라면 큰 딸과 같이 왔을 것이고., 아빠와도 미련이 없는 작별이 되었을 텐데..,물건도 다 챙겨서 가지고 왔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두고두고 남았다. 그때 그 일로 인해, 모든 일을 알아서 척척 한다는 똑순이의 이미지가 여지없이 무너졌다.


 

가슴을 치며 후회하는 나의 모습, 고통, 슬픔, 괴로움, 완전히 무너지기를 기다리는 것을 누군가가 옆에서 지켜보며 웃고 있지 않았을까..,라는 소름 끼치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부탁받은 문서가 분실(紛失)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자책으로 자신감까지 잃었다. 무기력하게 무너지는 모습으로 한 달이 지났을 때, 한국방문 기간 동안 집과 차를 지켜 주던 사람이 디젤용 차에 휘발유를 넣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모든 일은 책임이 따른다는 나의 철저한 사고방식에 소정의 금액으로 책임을 물게 했다. 어찌되었던 좋았던 사이가 그런 일로 찌푸리게 되었다.

 

한국에서 돌아 온 이후로, 하루가 멀다고 일이 생겼다..,우울증(憂鬱症) 비슷하게 몸과 마음이 다운이 되어 있을 때였다.

 

어느 날, 잠을 자는데 누가 목을 조르는 것이었다. 잠결이었지만 너무나 선명했다. 그런데 다음 날 말하기가 힘들어지더니.,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병원에 갔지만 특별한 병명이 없고 그냥 말 많이 하지 말라고 한다. 한국에서 성대 결절 수술을 하고 왔기 때문에 재발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나아지겠지하며 몇 달을 살았지만 좀처럼 좋아지지 않았고 듣는 사람들이 거북할 정도였다. 그러다가 우연히 알게된 선교사님의 권유로 침을 맞게 되었고 놀랍게도 단 한번으로 확 트인 깨끗한 목소리를 찾을 수 있었다.

 

 

 

 

 

몇 달 뒤, 애들이 영화에 출연을 하는 일이 있었다. 교회 행사로 모두 다같이 모여 부침개를 만들기 위해 모였는데, 빈정대기를 잘하는 한 엄마가 애들이 영화 출연한 것은 어떻게 알고, 묻는 것이다. “그렇게 바쁘다는 사람이 영화에 출연할 시간은 있나봐?” “얼마를 받았냐?”는 등..,계속적으로 비아냥대는 것이다. 원래 그런 스타일의 사람이어서 언짢았지만 그냥 넘어갔다. 그런데 집에 가도록 비아냥대는 것이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한 엄마가 “야, 최 집사. 정말 잘 참았어..나는 싸움이 날 줄 알았어..최집사가 안 참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어”라고 했다.

 

가만히 있자니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 사람을 두 번 다시 보고 싶지가 않았고.,근처도 가기가 싫었다. 성격상 당장 풀어야 하는데, 말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자존심이 구겨져 버렸던 것이다. 한 달 정도 후, 금요 기도회에 앉아 있었는데.., 돌아보니 그 집사가 내 옆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순간,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다른 자리로 옮겼다. 집에 돌아왔지만., 그렇게 지내서도 안되고..내 행동은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전화를 했다.

 

“교회에서 우리 나이가 중책을 맡은 나이이고 우리가 아랫 사람을 이끌어 가야 하고 위의 어른을 밀어줘야 할 위치에 있는데..,우리가 잘해야 하고 본을 보여야 하지 않겠나...”

 

전화를 해줘 고맙다는 말로, 화해했다. 누구와 사이가 나빠져서 지낸다는 것은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다. 평소 인간관계는 정말 누구와도 잘 지낸다는 보증수표였는데..,외국에 살면서 특히, 2012년 그 해는 나의 인간관계에서 빨간 불이 커진 해였다.

 

그 무렵 교회에 앉아서 예배를 보고 있자면.., 사악한 마음이 싸~악 들어오는 느낌을 몇 번 느꼈는데.., 그럴 때마다, 마음의 변덕이 생기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애들이 좋아하는 그림 따라 그리기 책을 한 사람에게 주었으면 그걸로 끝내야 하는데 또 다른 사람 생각이 나서 그 책을 빼앗아서 다른 사람에게 주는 식이다. 변덕을 부리기 싫어하는 성격인데., 허구 헌날 이해 못하는 변덕이 나왔다.!!??

 

어느 날은 갑자기 누군가에게 편지를 썼다. 지금 생각하면..황당무계(荒唐無稽)한 일이다. 존경하고 멘토로 모시는 교수님이었다. 그런데…느닷없이 원망을 하고 연을 끊겠다는 편지를 쓰고 말았다. 그분은 굉장히 화가 났을 것이다., 나란 사람을 이해 못한 채.., 지금까지도 어떻게 해명을 할 수가 없이 그대로 있는 상태이다.

 

또한, 집에서는 강하게 주장하는 큰 딸을 억누르고 기를 죽이곤 했다. 똑똑하고 총명한 큰 딸은 알 수 없는 뭔가를 본능적으로 느꼈는지…이사를 고집했다. “너 이사가 쉬운 일이냐? 아니, 갈려면..네가 알아봐.” 라고 매번 무시했다. 살림도 컸거니와 지금 생각하면, 내 정신이 뭔가로 사로잡혀 있었던 것 같다.

 

큰 딸의 베스트 프렌드는 얼마전 이런 말을 나에게 했다. 클레어먼트 살고 있을때에는 심적으로 불안하고 급했는데..,지금은 참, 많이 편안해 보이고 안정되 보이고 유머가 있으시다고 하면서 많이 달라졌다고 한다. 그 때는, 단체로 움직일 때 조금이라도 늦는 사람은 교회에 데리고 가지 않았는데., 큰 딸은 교회를 거의 1년이상 못 가게 된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우리 가족 중에서 믿음이 제일 깊고 신실하다. 현재 교회에서 찬양을 인도하고 있는 아이가 당시에 교회도 못 가게 되었으니.,가족의 구원이 막힌거나 다름 없었을 것이다.

 

 

 

 

 

 

또, 이런 일이 있었다. 당시 운전 경력이 20년 가까이 되었지만 작은 실수 한번 낸 일이 없는데.., 파킹을 하다가 잠깐 옆에 세워 두었던 BMW 새 차를 아주 살짝 긁었다. 당황한 나를 보고 옆에 있던 사람이 너, 바보냐고, 그냥 도망가라고..말했다. 정말 그렇게 했다. 그런데.., 어떻게 찾았는지.., 차주와 경찰이 우리 집을 찾아 왔다. 조용히 다 수습했지만., 보험이 있는데…왜 도망갔을까. 워낙 작은 과실이었고 그게 첫 사고였다. 마치 중죄를 범한 것처럼..,그때는 너무나 끔찍한 사건으로 와 닿았다.

 

또 하루는 집의 메이드(가정부)가 바뀐 이후로…,물건이 많이 없어진다는 사실을 몇 달이 지난 뒤에야 알았다. 그만두라고 한 마지막 날에, 해프닝이 있었다. 아침 출근하자마자, 뭐가 필요하다고 잠시 나가달라는 것이다. 그냥 하라고 하고 난, 컴퓨터 앞에 앉아 인터넷을 했다. 그 아이는 내 뒤에서 열심히 원주민 말로 통화를 했다. 그리고 잠시, 가든 청소 때문에 15분 정도 밖에 있었다. 그리고 월급 정리, 사인을 받아 둔 것으로 그 메이드와는 끝냈다.

 

그 날 저녁에 애들이 숙제와 컴퓨터, 팩스를 사용해야 하는데.., 작동이 안된다는 것이다. 나가 확인해보니., 유선 전화선, 컴퓨터 선이 다 뽑혀져 있지 않은가..!! 낮에만 해도 인터넷과 전화가 잘 되었는데 언제 코드를 뽑았는지..,잠깐 가든에 있었던 15분사이에, 그 메이드가 저지른 일이었다.

 

 

 

 

 

우체국 사건도 어이없다. 미국에 계시는 두 분에게 감사의 성의를 표하고자 특산물을 보냈는데 얼마 되지 않는 물건임에도 우편료와 보험료만 12만원 이상이었다. 보내고 한 달이 지났지만 도착했다는 연락이 없어서.., 우체국에 찾아 가보았는데.., 물건이 행방불명(行方不明)이었다. 우체국 여직원이 장난을 친 것이었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우체국장을 만나 이야기 했더니 “그럼 여직원은 해고되고 감방에 갑니다” 하는거다. 아~~…긴 한숨이 나왔다. 벌은 받아야 하는데.. 꼭 직장에서 짤리고 감방에 보내야 하냐는 생각이 들었다. 연민(憐憫)의 마음으로 그냥 넘어 가기로 했다. 하지만 우체국을 지나갈 때마다..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나중에 두개의 우편물을 보내러 가면서 물건을 들고 가서 말했다. “너, 나 기억하냐? “모른다”고 했다. 그간 일들을 설명했다. “나는 네가 실수로 한 것으로 안다. 다음에는 그런 실수 하지마라, 지금 네 이름을 적은 종이를 찢어 버릴테니.., 다음부터는 절대 그러지 마라.” 그랬더니.., “Thanks, mam.” 한다. 그러는 눈빛에는 약간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그 외에도 은행에서 돈 사기, 체육관(스포츠)에서의 기간 단축시켜 돈 줄이기., 등등. 정말 많은 일들이 돌아 버릴만큼 잇따라 벌어졌다. 그나마 다행은 모든 일들이 큰 손해 없이 다 처리해 나간 것이다.

 

평소 귀신이야기 따위는 믿지도 않았지만 이런 일도 있었다. 클레어먼트 옛날 집은 길쭉하게 쭉 뻗은 복도를 통해, 거실로 들어가고 중간에 내 방이 있었다. 그리고 벽에는 애들이 받아 온 온갖 상장들이 붙여 있었다. 방에서 컴퓨터를 하고 있었다. 뭔가 바람이 사~악 지나가면서 상장이 펄럭거리는 것이 아닌가, 집에는 나밖에 없었다. 거실의 큰 문도 닫힌 상태였다. 잘못 봤나 했는데., 한번 더 바람이 이번엔 반대로 불더니 다시 상장이 펄럭이는 것이었다. 그제서야…, 우리 집의 이상한 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이사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임대 계약 기간을 남겨둔 상태였기때문이다.

 

우리 집에, 검정 강아지 한 마리가 있었는데 이름이 ‘해피’였다. 그런데..,녀석은 정말 천방 지축이었고 집밖에 뛰쳐 나가기를 수없이 되풀이했다. 집안에 있어도., 전혀 행복해 하지 않았고..,마지막 집을 나간뒤로 두 번 다시 볼 수가 없었다.

 

조카, 지환이는 끝에 있는 조용한 방을 사용했다. 그런데…, 항상 무섭다고 했다. 이모와 같이 잠 자고 싶어해서 한국 돌아 갈 때까지 같이 잤다. 큰 애도 작은 애도, 아빠 왔을 때에 만 그 방에서 잤다.

 

연말에 한국에 갔다 온 이후로, 내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도저히 간과(看過) 할 수가 없었다. 주위 사람들에게 자문을 구했고 한 분의 권사님을 소개 받았다. 그 분에게 전화로 일어나는 이야기를 들려드렸다. 권사님은 전화상으로 나를 위해 기도해 주셨고 귀신을 물리치는 방법까지 가르쳐 주셨다. 그리고 권사님은 한국으로 돌아가셨는데…, 당연히 공항에 나갔어야 했지만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차에 동승했다는 이유로 가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눌러 가지 않았다. 아직도 그때의 후회와 미안함을 마음 깊숙히 갖고 있다. 그렇게 도움을 준 분이 떠나는데도 가지 않는 불충(不忠)은 내 일생에 처음 있었던 과오이다. 그때 역시, 검은 그림자가 마음에 사악 깔려서 들어오던 느낌이 있었다.

 

어쨌든 권사님이 가르쳐 준 방법을 집에서도 하기 시작했다. 교회에서 예배를 보는데.., 또 뭔가 검은 그림자가 들어오는 느낌이 들었다. 마음속으로 외쳤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물러가라, 귀신아.”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 이후로, 변덕이 서서히 줄어들었고 없어지게 되었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점심시간에 구역 모임이 있었다. 전날 해 준 탕수육이 맛잇다고 해서 한번 더 해주기로 하고 막간을 이용해 준비 중이었지만 도저히 마칠 것 같지 않아서 포기하고 교회 갈 준비를 했다. 모임 장소에 거의 도착할 즈음이었다.

 

갑자기 ADT(보안시스템회사)에서 전화가 왔다. 집에서 알람이 울렸다는 것이다. 한 집사에게 집으로 돌아가봐야 겠다고 하니, “아~휴, 도둑이 들어 왔다면 떠난 뒤에 가는 것이 상책이에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왜 알람이 울렸는지..확인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았다. 집에 돌아왔더니 이게 무슨 일인가. 불이 나서 집안이 시커먼 연기와 그을림으로 한 치 앞을 볼 수가 없었다. 의문의 화재사건이었다. (화재 사건은 이전 뉴스로 칼럼에 소개한 바 있다.)

 

 

 

 

 

 

불행(不幸) 중 다행은 살림의 피해는 냄비 하나 빼고는 전혀 없었다. 하지만, 집안은 재투성이가 됐고 전기도 나갔다. 화재로 인한 배상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도 보통 고역이 아니었다. 견적만 2천만이 나왔다. 남아공에서 그 금액은 대공사였다. 다행히 그 모든 비용이 주인이 가입한 화재 보험에서 다 커버 되었다.

 

그러나 손과 얼굴이 재투성이가 된 채 한 달을 걸인(乞人)처럼 살았다. 공사는 2개월을 넘겼고 이사 나올 때까지도 끝나지 않았다. 불이 나서, 모든 살림들이 뒤죽박죽이고 인부들이 매일 15~16명이 왔다갔다하는 바람에 사생활이 완전히 노출됐다. 혹시라도 다른 범죄를 당할까 여간 불안한게 아니었다. 그 와중에 3남매와 2명의 조카 등 5명 뒤치닥거리를 혼자서 도맡아 해야 했다.

 

 

 

 

 

용케도 쓰러지지 않고 애들을 꿋꿋이 지키며 돌봤다. 몸이 힘들어도 다 감내 할 자신이 있었는데..,돌연 조카 둘을 한국으로 데리고 가야 한다는 제부의 연락은 청천벽력(靑天霹靂)이었다. 불 속에서도 살아 남겠다고 버티던 인내가, 여지없이 무너졌다. 사랑하는 여동생이 죽은 뒤로 그나마.., 많이 위안이 되었던 조카들이었다.


 

LG 과장이었던 제부는 아내 사망후 학교 선생으로 직업을 바꾸었고 계약직 선생으로 있었다. 그리고 외국으로 파견이 된지, 얼마 되지 않아서 계약직을 그만 두게 되었다. 그 바람에.., 조카들 지환이, 지현이가 생활비 문제로 한국으로 돌아와 새 엄마와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가족이 다같이 사는 것은 지극히 정상이다. 그런데 찬성보다는 반대의 마음이 더 컸던 것 같다. 화재로 인해 수습이 되지 않았으니 3개월만 더 유예(猶豫) 해달라고 부탁을 했지만 여기 상황을 모르는 제부는 끝까지 자기 고집을 피웠고 그 와중에 정말로 내가 해서는 안될 말들도 했던 기억이 난다.

 

워낙 많은 일들로.,너무 지쳐 있었던 탓도 있었다..., 남아공에서의 이사는 최소 2개월의 노티스(notice)는 줘야 가능하고 재계약 같은 경우는 12개월을 채워야만 한다. 그리고도 집의 손상이 없어야만 보증금을 다 받고 나가지만 못 받고 가는 경우가 태반이다. 갑자기 데리고 간다면., 그 큰 집에서 정해진 금액으로 두 배의 큰 살림을 하며 버텨야 하는데.., 도저히 그렇게 못할 상황이었다. 남편이 보내는 돈으로 저축이라도 하고 살았다면.,좋았지만 애들 교육비와 가욋비용, 식사, 문화비에 아낌없이 다 써버리는 성격이었다. 게다가 연말에 조카 비행기 삯까지 대주며 전 식구가 한국에 갔다 오는 바람에., 비축된 돈을 다 써버린 상태였다.

 

한 달만이라도 기다려달라는 간곡한 처형의 부탁에도 제부는 절대 양보가 없었다. 여동생이 의료사고로 죽었을 때에도 직장을 사직하고 6개월간 미친 사람처럼 1인시위를 하고 재판을 빠짐없이 쫓아 다녔다. 남편은 집 한 채가 날라 가도 좋으니., 끝까지 싸우라고 했고 우리 집은 항상 열 명 이상이 상주하는, 말 그대로 전쟁 아지트였다.


 

생활비 한푼 받은 적 없이 그렇게 한 집에서 살았다. 이런 상황을 아는 이웃집 사람들이 생활비를 조금이라도 받으라는 말을 해줘도.,그 말을 못하는 나였다. 생전의 동생은 몇 푼의 월세로 시작해서 집 장만을 소원했다., 허리띠 졸라 매면서 알뜰하게 살았다. 애들이 입학하면 직장생활 시작하겠다며 자격증만 10여개 가까이 준비했다. 그런데 그렇게 허무하게 가버렸다. 의료사고 이후 제부가 집 장만을 하고 싶어서 도움을 주었다. 그래야 새 장가라도 갈 수 있을 것 같아서..,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랬건만 처형의 어려워진 입장 한번 봐주지 않고 데려가버린 것이다. 그때의 원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다 이해가 간다. 아니, 오히려.., 내가 미안한 생각이 든다. 제부로선 어쩔 수 없는 판단일 것 같다. 여기 일은 내가 극복할 문제이지 제부의 문제는 아니니까.., 그 해는 정말이지 내가 액운(厄運)이 끼지 않았다면., 애들도 제부도 편안한 삶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도 든다.

 

 

 

 

 

 

제부가 애들을 갑자기 데리고 가는 바람에 경제적인 것도 힘들었지만 작별의 인사도 할 시간도 없었던게 너무 마음이 아팠다. 조카들이 가고 난 빈 자리로 인해, 우리 가족은 또 한 번의 슬픔을 겪었고 하루는 다같이 주방 정리 하다가., 바닥에 앉아 엉엉하고 울었다.

 

어쨌든 그 일로 심각한 고민에 부닥쳤다. 남편이 보내주는 생활비는 고정적인데., 두 배의 큰 살림을 유지하는 것은 버티기 힘든 정도가 아니라., 남아공을 포기하고 돌아가야 하는게 아닌가 하는 상황이었다. 솔직히 남편의 월급이 얼마인지 모르고 살았다.,금전때문에 아쉬운 소리 한번 하지 않고 살았기에 끝까지 남편에게 돈 이야기를 하지 싶지 않았다. 교회 식구와 주위 엄마들에게 불이 난 집의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고 동정이나 약한 모습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불이 난 살림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될 무렵, 작은 집으로 이사를 해야 했다. 부동산 친구, 앤한테는 서운하지만.., 어쩔수 없이 이사를 통지했다. 12월까지는 무조건 살아야 한다고 했지만, 경제적인 사정을 말하니., “도와주기는 하겠지만 두 달은 더 있어야 한다”고 했다.

 

크리스찬임에도 불구하고 그해 워낙 많은 액운이 덮쳐 우연한 기회에 미국에 계시는 저명한 분에게 여쭈어 보기까지 했다. 대체, 무슨 일이 내 주변에서 생기고 발생하는지..알고 싶었다. 정말 족집게 같이 맞추었던 것 같다. 한마디로 내 일생에서 바닥을 친 해였다고 한다. 그리고 형제 한 분이 돌아가실 것까지. 그 분 말대로 해가 바뀐 2013년에 큰 언니가 하늘 나라로 가는 바람에 일주일을 울며 보냈다. 가족끼리 추모 예배를 본 다음 날에야 눈물이 멈추었다. 한국에서 같은 슬픔이 외국에서 혼자 느끼는 슬픔은 몇 배인 것 같았다.

 

<下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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